성난 빗물이 지나간 곳이,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흘러가지 못하고 머뭇거린 곳이, 길이 되기도 한다 웅덩이에 빠진 바퀴를 빼려고 몇 번이나 부르릉거리며 바퀴를 돌려도 헛돌며 웅덩이는 더 깊이 패이는 것처럼 가슴 그 어디쯤에도 길이 패이고 웅덩이가 깊어지는 곳이 있다 이 깊게 패인 곳에 머무는 머뭇거린 마음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성난 빗물만 살고 있다는 그대의 가슴에 닿고 싶어서 아픈 내 눈은 그대에게로 넘쳐흘러 갔지만 한번도 그대의 가슴 쪽에 이르지 못해 내 가슴 오래 아팠던 것처럼 오래 앓아 누웠던 시간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서로가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잠든 마음의 이마를 짚어보며 희고 찬 물수건을 얹어 주고 가는 느리고 따뜻한 손길이 서로에게 고요한 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가슴 한 쪽이 ..
-솔에게 햇살에 잘 마른 광목이 마당 가득 펄럭이는 여기는 너의 하늘정원 꽃잎만한 어깨선 위로 채송화 은빛 씨앗 같은 눈을 뜨고 종일 달빛보다 깊은 노래 부르네. 손가락 마디마다 과자 냄새, 볼에 입 맞추면 복숭아 두어 개 둥실 떠올라 한입 가득 베어 물면 까르르 강물 지는 세상. 너의 눈썹을 타고 그 끝에서 새들 무수히 날아가고 붉은 꽃잎 따서 네 열 손가락 물들이면 손가락 끝에서 점점 커지며 자라나는 동그라미 하늘에 올라 뭉게구름 되고 나도 그 꽃잎을 따라 네게 물들거나 구름 위로 몸을 누인다. 물든다. 물든다는 거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 그 투명한 방 속에 간장 종지 같은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살림을 차리는 거라네. 그 방 속에 산을 들이고 하늘을 들여 한세상 가만히 걷는 것이야. 들리지 않니? 세상..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갈 줄 알아라 * 박해석 - 사랑 속잎 돋는 봄이면 속잎 속에서 울고 천둥치는 여름밤이면 천둥속에서 울고 비오면 빗속에 숨어 비 맞은 꽃으로 노래하고 눈 맞으면 눈길 걸어가며 젖은 몸으로 노래하고 꿈에 님보면 이게 생시였으면 하고 생시 님보면 이게 꿈이 아닐까 하고 너 만나면 나 먼저 엎드려 울고 너 죽으면 나 먼저 무덤에 들어 네 뼈를 안을 *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이곳도 하늘이다. 사랑하는 이의 뼈를 안고서 한없이 웃고 있을 것 같다.
사랑이여, 굶주린 발톱으로 성난 매의 하늘을 다 제압하기까지는 그대 젖꽃판에 늘어붙어 풋잠이나 청할 수밖에. 그리운 내 마음의 천칭天秤 위에 그리운 그대 마음의 무등無等의 옥돌이나 놓을 수밖에. 어쩌다 바람은 초록의 잎새 위에 그대 대마大麻의 속곳만 뒤집어놓고... 나는 불타는 눈으로 그대 눈부신 살결이나 어루만지고... 오, 사랑의 모기둥에 못을 박으며 영혼도 살에 붙어 피륙을 짜고 걸립패乞粒牌 어깨춤에 피가 돌아 지고 새는 나날의 이 슬픈 사랑놀이. 그대 머리의 국화판菊花板에 하늘이 앉아 하늘의 손짓으로 나를 불러도 나는 바람을 안고 모로 걸으며 피보다 붉은 네 살의 꽃잎 위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초개草芥인 것을. 오늘도 잠 못 드는 하늘 아래 꿈마저 오지 않는 석달 열흘을 십 리 뻘 물들이는 축축한..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 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 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바람 자는 숲 속길을 걷다가 문득 범종소리를 들었다. 살아갈수록 멀어지는 진심이 내 안에도 진흙 속의 푸른 하늘처럼 펼쳐져 있음을 일깨우는 저 범종소리에, 이미 대나무며 상수리 나무들은 다 깨달아 별스런 일도 없는데, 오직 나 하나만 우둔한 먹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나 하나만 천하의 먹통이라면, 저 범종소리는 다름아닌 무쇠공 같은 나를 깨기 위해 저렇게 거듭거듭 울고 있는 것이리라.* *차를 타고 도시의 건물 숲 사이를 걸어간대도 멀리서 문득 범종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살아갈수록 멀어지는 진심과 그 진심이 통하지 않는 삶속에도, 그래도 푸른 하늘처럼 무엇인가를 꿈꾸게 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들수록 주책만 늘고 있다.